일을 하다보면, 어떤 일이 수행되는 데에는 여러가지 뎁스(Depth)가 있다는 생각든다.
저 위쪽에서만 노는 사람(예를 들어, 상당수의 조직의 관리자)은 어떤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그 프로젝트가 수행되기 위한 리소스 (펀딩 혹은 더 큰 조직으로부터의 지원 인력, 추가 고용 인력을 받을 수 있는 TO 등)을 구해온다. 그 능력이 조직의 관리자를 평가하는 중요 지표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관리자들이 새 프로젝트를 구성할 때, 내가 이 프로젝트로 리소스를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해석을 하려고 해도, 이것은 분명히 주객이 전도 된 상황이다. 그런 관리자는 조직을 운영하는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리더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나 학교 쪽에서는 '나'의 실적보다는 그래서 이를 통해 어떤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대해 깊은 고민이 담겨야하는 데, 그런 철학을 갖춘 리더를 많이 보지 못해서 슬프다.
그렇게 관리자가 수면에서 따온 일들은 이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분배가 된다. 예를 들자면 어느 정도 직책이나 직위, 혹은 학위가 있어야 공식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비싼 실험 장비를 구입해야한다던가, 펀딩을 제공해준 기관에 중간 결과를 발표하러 가야한다던가, 새로 충원된 인력을 교육시켜야한던가 하는 일들을 분명 중간 관리자 급에서 맡아주어야한다. 중간 관리자가 수행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을 세분화하고 가능한 최대로 구체화하여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고 정기 미팅을 통해 지속적으로 일의 진척도를 점검하는 일이다. 이는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항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며 조직에서 가장 일상이 되는 일이다.
중소기업 정도의 규모만 되도, 여기서부터 제일 수면에 있는 저 위의 관리자가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일단은 돈을 다 따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이상 미래의 돈이 더 나올 요소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관리자의 다음 목표는, (일은 전혀 마무리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추가적인 돈을 딸 수 있도록 외부와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시류를 읽는 노력인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조직에서 제일 말단에 있는 실무자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제일 말단의, 손이 많이 가는 잡스러운 일들을 도맡게 된다. 실험을 수행하면서 구체적인 데이터를 모으고, 중간 관리자와 정기 미팅에 보고할 자료를 만드는 일을 수행한다. 그 댓가로 실무자는 '월급'을 받게 된다. 실무자의 일은 정말 바쁘고 부지런해야 한다. 정기 미팅에서 중간 관리자가, 혹은 잠시 참석한 관리자가 어 이건 왜 이렇게했어? 한번 수정해볼래? 하고 몇 초의 코멘트를 만족시키기 위해 말단의 실무자는 일주일을 날리기도 하지만, 지시자는 본인의 지시 내용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되면 실무자가 일에 대해 갖는 애착은 점차 감소하게 되고, 정말 받은 만큼만 일하자라는 마인드를 갖게 된다. 아무리 본성이 성실함으로 무장한 훌륭한 조직원이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그 역시 사람인지라 반드시 동일하게 귀결된다. 그 결과 실무자도 자신의 나태로 인해 조직만큼이나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실무자의 경험이 부족해서 정말 하나의 코멘트를 담아 일을 수행하는 데 온전한 일주일이 걸렸다고 하자.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실무자는 그 속에서 본인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고, 나중에는 하루, 심지어는 한 두 시간의 일로 끝낼 수 있지만, 이전의 경험 속에 실무자에게는 그것이 "받은 만큼"이 되고 나머지 시간은 그저 농땡이를 피는 데 사용하게 되고, 그로인해 자기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조교수라는 위치는 위에서 언급된 모든 뎁스의 일을 다 혼자서 커버쳐야 하는 상황이다. PI나 지도교수 등 누군가의 그늘에서부터 벗어나, 저 수면위의 일을 커버하면서 - 학생도 뽑고 그와 동시에 부족한 학생을 커버하여 가장 말단의 일도 도맡아서, 논문 작성을 위한 데이터 플랏하기 등까지 다 수행하여야 한다. 외부로 보이기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조직의 사이즈만 되어도 이런 풀커버의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조교수라는 직업을 '자영업자', 더 재미있게는 '구멍가게 사장'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나중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이 일이 매우 흥미롭다고 한다.
최근에 명문 K대학으로 이직한 어떤 교수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와 같은 명문대에서는 "논문 쓰기"보다는 오히려 학생을 잘 키워내서 박사 졸업시키기 등이 더 테뉴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본인도 연구보다 거기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생각보다 재미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으로 소외되는 실무자에 대해 생각하였다. 우리에게 실무자란, 나 자신을 뺴고나면, '학생'이다. 학생이 자기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다면, 대학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학생이 소외되는 일을 막는 가장 큰 일은, 교수도 함께 실무를 나누어 맡아 진행해가면서, 해당 프로젝트의 저 밑단 수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같이 수행해나가는 일이 적어도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정량적 목표를 조금 덜 달성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모든 뎁스의 일을 다 커버해나가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구멍가게 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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